오로지 Church

같은 더러움이라도 겉에 묻은것과 속에 들어간건 다른겁니다.

디디대장 2009. 6. 25.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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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더러움도 겉에 묻으면 그냥 더러운 겁니다. 빨리 닦으면 됩니다.

그런데 그게 안에 들어가면 다 더려워져서 부정한 것이 됩니다. 더러운데 닦을수가 없는겁니다. 이건 좀더 복잡한 과정을 걸치거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부정은 마음이니까요. 콜라병을 생각하시면 쉽게 이해가 될겁니다.

 자신은  부정적인 생각조차 거부한다는 젊음이를 어제도 만났어요. 그래서 부정적인 말도 생각도 안한답니다. 싫어해서 피한다는거죠. 이런 사람은 사실은 매우 부정적인 성격 가능성이 높아요 .
이 젊은이의 자아는 콜라병이 아니라 넓은 그릇인겁니다. 뭔가 조금만 더러움이 튀어도 의심하게 되는겁니다. 그릇안의 액체에 들어간것이 아닐까 하구요. 불안한겁니다.  

 그 젊은이의 문제는 부정적인걸 긍정으로 바꿀 힘이 자신에게 없고 그걸 조절할 능력조차 없다는걸 자신도 모르게 인정한 꼴이 되었지만 그 사실 조차도 모르고 있는것 같았습니다.

 객관식 문제를 풀때 먼저 제일 틀린답 부터 빼내는 이유는 모른다는거죠. 자신의 뛰어난 실력으로 정답만 찾겠다는겁니다. 교만한건지 정말 뛰어난건지 아리송하게 자기를 위장했어요. 부정을 판단할 힘도 능력도 지식도 없으면서 피하는거라면 진짜 문제가 될겁니다. 

 한쪽만 알면 반대편도 몰라도 잘 될거라는거죠. 자동차로 치면 구동장치가 앞에 있는 차가 앞바퀴만 있으면 뒷바퀴에 없던 있던 달린다는 말을 하고 있는겁니다. 그러면서 자기 방법이 옳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고 있는걸 보니 웃음이 났어요.

부정을 해결하면 모두 긍정이 될수 있다는걸 전혀 모르는겁니다.

 마치 큰 잔에 좋은 술이 들어 있는데 꾸정물이 한방울 들어갔으니 못먹는다고 그룻까지 버리겠다는 것과 같아요. 그릇은 깨끗하게 해서 겉과 속을 닦아 내면 다시 쓸수 있다는걸 생각 못하는거죠.

 아니요 이것보다 좀더 심해서 꾸정물이 그릇표면에 묻었는데 속까지 더러워졌다고 다 버리겠다는 미련함인것 같습니다. 이런걸 강박관념이라고하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요. 더러운것과 부정한건 다른겁니다. 뭐에 따라 다르냐면 어디에 묻어있냐에 따라 다르게 되는겁니다. 그냥 겉에 묻은거면 닦아 내면 됩니다. 하지만 속까지 더러워진거라면 버려야 하는겁니다. 그런데 자아가 넓은 그릇이거나 큰 잔이라면 내용물은 쉽게 더러워 질겁니다. 그래서 들어가는 구멍이 작은 병이 좋습니다.

 같은 더러움이 생겨도 말입니다. 그릇의 모양에 따라서 심각한 반응이 나올수도 있고 너무나 쉽게 넘어가는 사람이 있는겁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더러움을 만납니다. 그때 그 더려움이 어디에 묻었나에 따라서 전부를 버릴수도 있고 바로 쓱쓱 닦고 원래의 상태로 바로 돌아올수도 있는겁니다.



* 아래는 기독인만 읽으세요.



+ 제글은 옳고 그름의 판단후 더러움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 위의 꾸정물은 표준어가 아닙니다. 표준어는 구정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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