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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우리를 심판자로 부르셨는가?

디디대장 2021. 6. 13.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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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우리를 심판자로 부르셨는가?

 착각에  빠진 완벽주의 성도와 목사

 교회 안에서의 갈등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얼마나 큰지 일반 교인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직원이거나 교회 봉사일에 깊숙이 들어온 일부 사람들만이 경험하게 되는 일이다.  교회 안에서의 갈등은 지옥을 맛보는 것 같은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교회에서는 목사와 장로의 갈등도 심각하지만 목사와 목사의 갈등, 전도사 간의 갈등, 직원과 직원의 갈등, 성도들의 갈등 등등, 모든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갈등이 존재한다고 보면 된다. 예외는 없다.

 교회 일에 깊숙이 들어갈수록 갈등은 참을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을 넘어가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인내하고 참고 잘 다니고 있다면 그건 내공이 상당한 거다.  

어제 일이다. 대형 교회 영양사인 아내가 드디어 폭발했다.

 주변의 모든 사람,  담임목사까지는 아니어도 그 아랫것들까지는 가만두지 않겠다며 날뛰는 식당을 책임지는 권사가 영양사인 아내까지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의 모든 사람이 틀리다고 주장하는 자기중심적인 폭군이 탄생한 거다.

 아내는 이 권사와의 갈등이 결국 참을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서자.  교회 사무장을 찾아간 거다. 그동안의 이 권사의 폭언과 부당한 지시 즉, 믹서기 사 오고 소고기값으로 지불하겠다고 고깃집 사장에게 부탁하라는  횡령 지시, 조리한 음식 냉동해서 재탕하여 다시 급식하는 위생법 위반 지시, 주변 사람 욕하면서 감정을 드러내며 하는 막말과 욕설로 정신적 피해 및 인격 모독 등등의 문제를 녹음한 파일과 함께 말해 버린 거다. 물론 내가 미리 준비시켰다. 녹음은 불법이 아니지만 제삼자에게 주지 않으면 된다. 역시 사무장이 녹음 파일을 달라고 해서 그건 법 위반이라 안된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미리 가르쳐주길 잘한 것 같다.

 교회 일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난 누구보다 확실하게 이 권사를 제거할 방법을 알고 있다.  하지만 제거가 목표는 아니다. 왜냐하면 또 다른 사람이 와도 똑같은 행동을 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런 행동이 어디서부터 시작되고 끝이 어디인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없기에 더 심각해지는 것 같다. 오랜 세월 약 20년간 여러 교회의 직원으로 일하면서 관찰하고 글을 꾸준히 써오고서야 알게 된 사실을 다시 이 글에서 정리해 보는 거다. 

 다시 아내의 교회 현장으로 가보자. 교회 사무장에게는 식당 담당 권사의 횡포만 보고하고 조용히 있다 1년을 채우고 퇴사하겠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말한 아내가 하루가 지나자 점점 심판자로 변해가면서 이젠 그 권사는 꼭 제거해야겠다로 변했다.  악마로 변한 권사를 정의라는 이름으로 심판하겠다는 거다. 아내가 심판자 라이선스를 언제 땄냐면 갈등이 오고 스트레스를 받다가 그만둘 결심을 하고 나 하나 희생해 권사를 내보내야겠다는 결정을 한 직후다. 나의 정의로 식당의 조리원과 목회자와 직원의 식사권이 보장되게 하겠다는 거다. 음식을 재탕하거나 식당 출입자를 모두 버릇을 고쳐 놓겠다는 폭군을 제거하겠다는 거다.

그래서 말해 주었다. "그 권사도 출발도 자기 기준으로 잘못된 일에 대한 바로잡겠다는 정의로 방법을 찾아 해결하겠다는 생각으로 사명감으로 했을 것이나  어느 날  이것들의 버릇을 고쳐 놓겠다는 심판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사람과 똑 같이 심판하려 하고 있는 거 알고 있냐"라고 말해주었다. 

 

 교회 사무장이 알아서 하게 하고 그 결과는 정말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다면 하나님께 맡기라고 했다. 악한 자가 승리하기 전에 제거하겠다는 게 심판자가 되는 지름길이다. 이들이 이기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예를 성경을 인물을 통해 몇몇을 말해주었다. 

 보통 사람들이 처음 시작은 정의로 하지만 나중에는 있지도 않은 죄까지 만들고 자기 주변에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 놓게 되며 결국 심판하고 말겠다고 악해져 가게 된다는 걸 모르고 있다.  이때라도 멈추면 되지만 결국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흉기로 변하는 무서운 일이 생기는 거다. 

 

 흉기인 권사, 집사, 전도가, 목사, 장로 이런 사람 몇 명만 설치고 다녀도 교회는 지상 천국이 아니라 지상 지옥이 되는 거다.

 

 심판자가 돌아다니면서 지적질하고 고치라 하고 야단치고 다닌다고 생각해봐라. 1명이면 좀 그래도 그 사람 없을 때만이라도 평화가 찾아오겠지만 두 명 이상이면 이것들끼리도 지적질하면서 편을 만들기 시작하게 된다. 그럼 교회를 갈라놓고 자기는 하나님 편 반대편은 사탄 편 만들고 쇼를 하게 된다. 서로를 비난하고 사탄이라고 하게 되면 이 편도 저 편도 아닌 사람은 온통 사탄 놈들 안에 있게 되는 거다. 이런 짓을 목사들 조차 모르고 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게 한국 교회의 현실이다. 목사도 심판자 아니다. 몽땅 심판자 아니다 선언해야 할 판이다.

 기소와 판결을 동시에 하겠다는 것은 미얀마 군사정권과 같은 게 된다. 자기가 정의이고 유일하게 옳고 자신을 방해하는 세력은 다 똑같이 취급하고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보이게 되는 거다. 그러니 군대를 동원해 국민을 정조준 사격까지 하는 살인과 만행을 지시하고 정당화시키고 있는 거다.  이런 시야에서는 눈에 들어오면 누구든지 죽여야 하는 거다.

 이런 사람이 실제로 주변에 많고 교회 안에도 많다. 이런 실수에 쉽게 빠져드는 것이 결국에는 자기 파괴로 표현되며 쉽게는 사표를 내고 나가고 그다음은 나가면서는 같이 죽자도 하고 우울증도 오고 자살도 하기도 한다.

 자신도 모르게  미친개처럼 점점 더 날뛰게 되는 거다. 스스로를 파괴하는 행위, 나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하는 행위 이거 누가 조정하는 것 같은지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정의로 시작했지만 심판자로 미친개로 악마로 변해가는 것은 아주 쉬운 거다. 태극기 노인들이 심판자 되어 문재인 정권을 막 욕하고 멈추지 못하는 것도 이런 시작과 끝이 달라지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초심을 잃지 말라고 한다. 이건 처음 마음이 변하지 말아야 한다는 소리다. 은혜로 시작한 교회에서 봉급을 받는 직원이라면 은혜로 끝나야 하는 거다. 무급 봉사자라면 무급으로 봉사자로 끝나야 하는 거다.

시작은 정의였는지 모르지만 결과는 미친 개라면 스스로도 얼마나 억울할까 생각해보자

 그래서 아내에게 이야기해주었다. 심판을 멈추라고 정의를 외치는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과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게 불가능한데 왜 사랑하라고 하신 건가? 도대체 사랑은 뭔가?

 밤 12시가 넘은 시간 아내는 눈물을 보였다. 처음 교회 직원으로 들어가서 그 자리가 은혜인 줄 알고 감사했는데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것 같다.

 

 사람이 심판자가 되면 기분이 좋을 것 같지만 특히 기독인들은 마음이 힘들어진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걸 그냥 읽고 아는 것처럼 더 묵상하지 않고 끝내면 삶으로 나타날 수 없는 원수를 사랑하라가 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에서 사랑하려고 노력하라는 말이구나 하거나 믿음이나 성령으로 사랑하라는 말이구나 하면 내 것이 절대 안 된다. 많은 목사님들이 이렇게 설교하고 끝내고 있다. 

 오늘 나는 여기서의 사랑은 심판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로 정의하고 싶다. 이것이 신학적으로 맞는지 틀리는지 그건 신학자들이 연구할 문제일 뿐이다. '우리에게는 심판만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사랑일 수 있지 않을까' 정도의 정의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다 아는 것처럼 처리해 버리면 그렇게 정의를 멈추면 원수를 사랑하라가 불가능해진다. 심판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사랑이라는 걸 어디서 깨달을 수 있냐면 간음하다 끌려온 여인에게 서다. 

성경 요한복음 8장 1~11절에 있다.

1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우리가 용서를 사랑으로 보기도 하는 것처럼 심판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거다.
고린도전서 13:7 RNKSV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기독교 교회(성도)는 창조자시며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전파하는 곳입니다. 사랑이 "아이 귀여워 착하지"로 고정하면 원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인 줄 알고 심판하려 할 때 그 사람의 교회는 지옥이 되는 겁니다.

 다행히 아내의 교회 권사는 누구에게 뭔 말을 들었는지 아마도 마지막 경고를 받은 것 같다. 결국 심판자의 자리에서 내려왔다. 자진해서 내려온 것은 아니기 때문에 불안정하다. 하지만 지적하고 바꿔놓겠다는 심판자에서 섬기며 봉사하는 자리로 알고 해 보겠다는 말을 영양사와 조리원들 앞에서 아주 사납게 외쳤다.

 내 생각에는 오래 못가 또 지랄 날리 치고 까불다 스스로 나가버릴 것이 뻔하지만 일단 자숙하겠다는 것은 그래도 희망이라도 있는 것이고 진화는 된 것으로 본다.

섬김과 봉사는 오래 참음이라는 사랑일 거다. 하지만 이 권사에게 이것만 가르쳤다면 오래가지 못하고 사랑을 잃어버릴 것이 뻔하다.

일방적인 헌신과 노력은 한쪽이 죽을 때까지 참아야 가능한 거다. 서로 노력하지 않는 다면 한 사람 죽이겠다는 거다.

리더의 자리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자리이다. 그래서 언행을 조심해야 하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원칙으로 나가야 한다.

 목사나 장로가 아니면 권사 회장이 이 권사에게 "사랑으로 섬기는 자리이고 그곳의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 권사가 되세요"라고 했다면 이 권사는 회개하고 진정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다.

사랑받는 사람이 봉사하고 섬기는 교회가 된다면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거다. 교회에서 일 잘하는 사람 필요한 게 아니다. 어디로 보내도 사랑받을 사람을 파송해야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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