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란 소리 없는 소리를 듣고 눈을 감아도 보이는 게 있는 상태이다. 이 말을 바로 이해한다면 믿음이 뭔지 아는 분이고 모르겠으면 아직 좀 부족한 거다.
오늘도 교회 안에서까지 일 잘해보겠다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서 일 잘한다고 착각하는 한심한 사람을 보았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사회에서 하던 대로 교회 안에서도 일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세상의 기준으로는 답답하고 비효율적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라도 상처받게 하지 않기 위해서다.
얼마 전 헌금 도둑을 잡았다. 도둑은 새 신자로 다른 교회에서 온 분이고 착실하게 신뢰를 쌓아가다 헌금계수를 담당하는 곳에 봉사하겠다고 찾아와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다.
헌금계수하는 척하면서 무명자의 헌금을 도둑질하다 현장에서 잡혔다. 바로 경찰에 신고하고 다시는 이런 짓을 못하게 하게 처벌해야 하지만 교회에서는 이런 식으로 일 처리하지 않는다. 이유는 도둑의 가족까지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 집안의 가장을 처벌하고 출교 하는 게 최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1862년 빅토르 위고가 쓴 소설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을 용서한 주교의 마음이 아마도 여러 가지를 고려한 행동이 아니었을까 싶다. 은식기를 도둑질했지만 은촛대까지 가져가라고 했다면서 은촛대까지 준 주교의 행동을 비난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장발장은 이 일로 새로운 마음을 먹고살기 시작했고 결국 시장까지 된다.
오늘도 주일 예배 시간에 찬송가를 부르고 있을 때 난 눈을 감고 찬양을 하면서 기도하고 있었다. "오늘도 귀를 막고도 들리는 소리이며 눈을 감아도 보이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는가? "
여러분도 주님의 음성을 듣고도 모른 척하며 다시 들려주시면 순종하겠다고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불순종의 핑계는 못 들은 척이 최고라는 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귀를 막고, 눈을 감고 못 듣고 안 보인다고 말하는 어린아이 같이 행동하면서도 주님을 믿는다고 자랑하는 성도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러면서 기도한다. 주님의 음성을 들려달라고 하며 어찌해야 좋으냐고 물어보고 이미 답하신 음성을 외면한다.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답을 이미 정해 놓고 기도하기 때문이다. 원하는 걸 들어주는 요술램프의 요정 같은 하나님으로 착각하고 기도했는데 왜 내 소원을 안 들어주냐고 떼를 쓴다면 영원히 철없는 아이 같은 수준으로 평생을 살아온 거라는 말이 된다.
그러니 이젠 소리 없는 소리를 듣거나 눈을 감아도 보이는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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