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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rch

누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가?

by 야야곰 2025.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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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임목사가 마음이 안 들어서 내보내고 싶은 부목사가 있다. 사실 담임목사는 좋아하는 사람이 없는 사람 같다. 그동안의 태도나 말을 들어보면 다 마음에 안 드는 것이 확실하다. 그럼 속이 아주 불편하고 항상 짜증이 날 것인데 어떻게 견디는지 신기할 뿐이다.  이런 경우 모두 미움받고 일하거나 미움 안 받기 위해 일할 것이다.  사랑받기 위해 일해야 하는데 슬픈 일이다. 이 담임목사처럼 기준이 자신이면 남들이 다 미워 보인다. 아마 자기 자신도 마음에 안 들 것이 분명하다.
 
  담임목사는 이 교회에 부목사가 정말 필요한 사람일까 고민조차 안 하는 것 같다. 왜 이 불편한 부목사를 하나님이 여기에 놓으신 건가 고민하지 않고 내가 상사니까 내 부하 직원이니까 내 권위에 복종해야지 왜 내 말을 안 들어하는 것 같다.  장로들에 줄 서고 그 힘으로 버티기 하는 것 같아 정말 싫을 것이다. 장로들에 의존하고 자기를 무시하는 것 같아 약오를 것이다. 

 
그런데 정확하게는 장로에게 줄 서는 게 아니라 장로가 부목사에게 줄을 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만큼 담임목사가 장로들에게 잘하지 못하거나 약점이 잡혔거나 미움받고 있다는 뜻인데 이걸 반대로 부목사가 장로에게 줄을 서고 자기 욕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것도 반대로 장로들이 담임목사 욕을 하고 부목사가 들어주고 '그래도 이해해 주세요' 하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는 것 같다.  

담임목사


요즘은 일반 기업에서도 권위적인 태도를 사용하지 않는다.  화내고 짜증 내고 욱박지르면 요즘 사람들은 열심히 일 안 한다.  흥이 안 나고 힘들기만 하고 열심히 해도 욕만 먹는데 누가 최선을 다하겠는가~


무너진 권위
젊은 사람들이 교회를 기피하는 이유 중 권위적인 분위기 직분의 계급화가 꼭 들어간다. 이 말은 요즘 사람들에게 권위는 개나 줘 버려야 한다는 인식이 강해져서 일 것이다. 가정에서 아빠의 권위도 무너진 지 오래고 학교에서 선생님에 대한 권위도 무너졌다. 그리고 회사에서 상사의 권위도 없어졌다. 그런데 아직도 권위가 통하는 유일한 곳이 아마도 교회인 것 같다. 
 
 물론 전에는 부목사들이 담임목사의 말에 항거하거나 말대꾸조차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요즘도 많은 교회에서 부목사는 실제로 한마디 못한다. 아니 발언 기회도 안 준다. 왜냐하면 담임목사 중심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걸 권위라고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물론 교회 규모마다 각 교회마다 그 수준과 수위가 다르다. 
 
 권위는 밑에서 세워줄 때 발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선동을 하면 무너지는 게 권위다. 그러니 요즘 리더들은 함부로 말도 못 한다. 하소연도 못한다. 


 간혹 부목사의 태도나 말에 흥분을 해서 그 티를 내는 담임목사가 있다면 모든 성도가 담임목사 편들어 줄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이미 세상이 변했다. 요즘은 담임목사의 태도가 권위적이였다면 그 지적도 한다.  
 
 담임목사의 말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기는 목사가 있다면 그 사람은 곧 불행해질 것이다. 그런데 내 뜻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기는데 그게 통한다면 아마도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있거나 바로 아래 있다고 우기는 이단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일반 성도와 마찬가지로 목사의 자리는 내 뜻이 없어야 한다. 자유의지가 없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내 뜻과 결과가 다르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위임받은 내 고유한 권한이라 해도 말이다.  
 
하나님의 뜻과 순종
 하나님의 뜻은 사실 성경에 이미 다 쓰여 있다. 그것도 아주 간단하고 명확하게 쓰여 있다. 그런데 이게 아주 복잡한 것처럼 꼬고 비틀어서 설명하는 게 문제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착하게 살아라는 말이 전부다.


 모든 결과의 승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다 말할 수 없겠지만 결과는 대부분 하나님의 뜻인 경우가 많다. 미래를 점칠 수는 없어도 결과는 누구나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 결과가 나왔다면 하나님은 이 세상을 통치하지 않으신다고 말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무시할 때 승복할 수 없는 것이다 순종하지 못할 때 다른 하나님의 뜻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순종은 교회에서 아주 기본적인 덕목이다. 그러니 이 사회에서 권위가 무너진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이걸 거부하고 무너진 권위를 세우겠다고 하는 것은 불순종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무너진 권위를 세우려는 어리석음
 무너진 권위 때문에 안타까움을 느낀다면 참 고리타분하고 시대에 뒤처지고 센스 없고 무식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백하는 꼴이 된다.  여기서 또 무너진 권위를 세우겠다고 억지를 부리면 정말 어리석은 짓이 된다. 왜냐하면 권위는 아래서 세워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권위적이게 행동해서 권위를 얻는 것이 아니다. 
 
 나의 말에 욕심이 없고 악함이 없고 자비로우며 인자하며 모두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친다면  권위가 안 세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아래서 권위를 세워 준다해도 이젠 권위를 쓸 일이 없다. 왜냐하면 명령하던 시대는 지났다.
 
 아무리 부하직원이라 해도 물어보고 의견을 듣는 민주주의적 절차가 필요한 게 현대 사회다. 그러니 권위를 왜 무시하냐고 따지거나 권위적인 방법으로 명령하고 자신에게 순종을 강요하면 안 된다. 그럴수록 더욱 고립되고 아무도 상대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최고 리더십을 가지고 있다 해도 말이다.
 
가정에서 아빠도 이젠 텔레비전 채널권을 양보하거나 공평하게 쓰도록 해야 하고 직장에서 부장님도 존칭을 생략하거나 반말을 해서는 안된다. 교회에서도 담임목사가 명령을 하면 그대로 해야 하는 시대는 끝났다.
 
 장로들과 목사가 자꾸 싸우는 이유는 장로를 무시하는 목사 때문이다. 장로들도 권위적인 목사에게 그냥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를 지켜야 하는 장로 입장에서 목사 맘대로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게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목사에게 장로가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모든 책임이 담임목사에게 있으니 내 말대로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담임목사 자리도 위태롭게 가야 할 것이다. 
 
 타협과 협의와 이해를 구하는 태도가 이젠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독불 장군하던 시대는 아주 끝나버렸다. 권위적이었던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했을 때 부당한 명령에 명령 불복종을 한 군인을 보았을 것이다. 장관이, 사령관이 이야기해도 부당함에는 저항하는 게 요즘 군인들이다. 
 
권위가 없으면 어떡하냐고 걱정을 할 것이다. 
 권위적인 것으로 운영하던 시스템이거나 그것밖에 모르는 리더십은 이것이 어마어마한 위기로 보일 수 있다. 그런데 혼자 위기의식을 가지고 떠들면 남들이 뒤에서 비웃는다. 왜냐하면 수평적 리더십을 추구한 곳에서는 권위 따위는 필요 없다. 요즘 사람들은 잘 대해주어야 더 일을 잘하기 때문이고 권위를 쓰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일들을 잘 해내기 때문이다.
 
 불안해 하고 감시하고 리더의 뜻이 항상 옳던 시대는 지났다. 젊은 사람들의 생각이 더 급속히 바뀌는 사회에서는 젊은 사람의 생각이 맞는 경우가 많아지다 보니 신입인  MZ 세대의 의견을 꼭 확인해 보아야 하는 것은 불문율이다. 권위적인 조직을 버리고 수평적이고 젊은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성공한 사례가 마구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리더의 능력보다 신입사원의 능력이 더 중요한 시대
 모두가 정보력을 가지고 있고 사람들의 능력 차이가 별로 안 나는 시대에 산다. 앞으로는 AI 때문에 더욱 그렇게 될 것이다. 국 리더의 안목이 절대 옳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어쩌면 이미 리더의 안목 따위는 필요조차 없는 시대인지 모른.
 이걸 인정하지 못하면 앞으로 계속 뒤처지고 몰락해 갈 것이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좋은 설교와 서적이 얼마나 많고 접근하기 쉬운지 모른다. 목사가 남의 설교나 자기 설교 짜깁기 해서 설교했다가는 쫓겨난다. 자기 설교대로 살지 못하면 성도들에게 무시당할 것이다. 그걸 들키면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기 때문이다. 
 
착한 사람이 승리하는 시대로 가고 있다.
 도덕적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권위적인 것을 버리고 양심적이고 도덕적이며 선한을 추구해 간다면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올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가 그런 사람을 원하고 있는데 마침 교회가 그런 교육을 잘하고 있다면 왜 교회 다니는 사람을 싫어하겠냔 말이다.

 개개인의 능력은 이젠 의미가 없어지는 시대로 왔다. 정보화시대만 해도 권위를 무너지게 했으니 말이다. 혼자 고급 정보를 알고 잘난 척하던 시대가 끝났다.

 

 이건 영적인 문제를 다루는 교회도 마찬가지다. 마음만 먹으면 무료로 얼마든지 좋은 설교와 강의를 충분히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신학생들만의 전유물 같았던 정보조차도 이젠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그리고 빠르고 신속하게 정보를 다듬고 손질해 줄 AI까지 등장했다.

 

 그러니 설교를 잘하는 것도 의미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그럼 남는 것은 얼마나 착하냐 밖에 안 남는다.

 멋지게 말하면 사랑이 얼마나 많은가 일 것이다. 목사가, 담임목사가 사랑이 얼마나 많은가 얼마나 자비하며 은혜스러우면 오래 참고 기다리는가 하는 능력이 곧 영적 능력이 되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를 생각해도 되고 산상수훈의 말을 생각하게 된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마음이 가난한자, 슬퍼하는 자, 온유한자, 옳은일에 주리고 목마른자, 자비를 베푸는 자, 마음이 깨끗한자, 평화를 위해여 일하는자, 그리고 옳은일을 하다 박해를 받는자, 터무니 없는 말로 비난을 받는자

 


1990년 정보화 시대가 도래하고 다양성이 증대하고 밀레니얼의 등장으로 급속하게 시대가 변해 왔다. 그리고 2000년 이후 창의성과 혁신의 중요성 시대가 되면서 수평적인 조직 문화가 더욱 발휘되어 인식이 확산되고 변해 갔다. 그리고 일과 삶의 균형을 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구성원들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유연한 근무 환경이 제공하는 수평적 리더십이 각광받게 되었다. 그리고 코로나 19 팬데믹은 비대면 근무 확산과 구성원 간의 신뢰와 자율성을 바탕으로 하는 수평적 리더십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그리고 AI시대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AI를 잘 활용하는 사람이 능력이 있어 보이겠지만 결국 평준화 될 것이다. 그리고 남는 것은 얼마나 도덕적이고 착하고 인간미가 넘치냐의 문제가 능력이 될 것이다.

 

그러니  착한 것이 능력이 되는 날까지 착한 성품을 유지하기 바란다. 나쁜놈들이 더 잘되는 시대는 이젠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