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지 Church

결과가 좋으면 하나님 뜻이고 결과가 나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디디대장 2022. 7. 13.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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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린 요셉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그는 이복형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고 한 형의 제안으로 노예로 팔려가서 고생 끝에 이집트의 총리가 된 이야기다.  그는 이복형들이 이집트에 와서 식량을 요구했을 때  그 형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노예로 팔려와서 총리가 되는 이 과정도 다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말한다. 멋진 신앙의 승리다. 따라서 형들에게 원수를 갚는게 아니라 용서하는 사람이 된거다. 원수도 사랑하는 요셉의 모습이다. 

 

 그런데  결과가 좋았으니 다행이지 생각해 보면 요셉이 그 나이가 되어서 그냥 평범한 노예로 살고 있다 우연히 형들을 만났다면 아마도 형들에게 가족과 자신을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요구했을 것이고 형들은 그 전과 마찬가지로 동생을 버렸을 것이다. 그때도 요셉이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니 가능성이 적어 보인다. 

 

  많은 성공담의 내용은 고난을 이기고 성공하는 해피엔딩 스토리가 대부분이고 그것이 이야기의 정석 일지 모르겠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에서도 드라마 처럼 해피엔딩 스토리를 찾아서 보고 즐거워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의 주인공이 자신이라면 어떨까? 

 내가 요셉이라면 이복형들이라지만 형제인데 형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하다 겨우 목숨만을 유지하고 노예로 팔려가서 노예 생활을 한다면 말이다. 이 경험 자체가 비참하기 때문에 결과가 그 나라 총리의 자리까지 올라가는 인생 성공 스토리라 해도 노예생활 경험은 피하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결과가 나쁘다면 절대 그 길을 가지 않을 것이다.

 

 요셉은 출세와 성공은 결과적으로 야곱의 형제들과 식구들이 굶어 죽을 뻔하다. 모두가 애굽에 와서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이야기 결말이다.  하지만 요셉을 포함한 형제들의 후손들은 결국 애굽 사람들로부터 차별을 받으며 살아야 했던 역사를 알 것이다. 노예와 같은 삶 말이다. 그래서 모세의 등장으로 애굽 탈출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는 거다.  

 

 신앙생활을 하는 오늘 우리에게 요셉과 같은 사건은 아니라 해도 성공하는 삶을 추구하는 게 정답이고 성공의 기준도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돈 많이 벌고  높은 지위에 올라서 인정받는 사람 되는 것으로 결정해 버린 상태다. 몇명만 행복한 사회를 만들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적어도 목사들 만큼은 이런 성공 지향적인 삶을 살지 말아야 함에도 실제로는 성공한 목사란 교인수가 많고 큰 건물에  편하게 목회하면서 사례비도 억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소수만 행복한 사회와 교회라면 이런 곳에서 희망이 있을까 싶은 거다

 농경문화의 발달로 도시화되고 사람이 집중해서 살아가면서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모두 노동에 뛰어들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더 빠른 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오늘날에는 노하우라고 하는 기술이 모든 사람에게 공개되는 사회가 되었고 이젠 기득권을 내려놓고 함께 살아가야 하는 시대로 변하고 있다. 

 

  그동안 알고 있던 지식인 노하우가 이젠 몇 년을 갈지 마무도 모르는 하찮은 지식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쥐고 있으면  고여 있으면 손해를 보고나 썩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결과가 나쁠 지라도 행복해야 하는 거다

 하나님의 뜻에도 우리의 기준으로 나쁜 결과가 있고 좋은 결과가 있다. 선교지에 도착하지 마자 죽은 선교사 한 권의 성경책만 남기고 죽었으나 그것이 힌 생명을 구원한 이야기가 있는 나라가 대한 민국이다. 아래는 그 이야기가 있는 사이트다.  

http://www.saeronam.or.kr/home/tour_zone5
 

한국교회사

 

www.saeronam.or.kr

"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조선 선교의 놀라운 특징은 ‘선교사보다 복음이 먼저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1866년 한국 최초의 선교사인 토마스 선교사는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조선 땅에 도착하자마자 죽음에 직면하게 됩니다. 당시 셔먼호 선장이 조선의 군인 이현익을 억류해 통상을 요구하며 총과 포를 쏘는 등 강압적인 행동을 하게 되고, 이에 격분한 조선의 군인들이 배를 공격해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모두 죽이게 됩니다. 복음을 들고 왔던 토마스 선교사는 죽기 직전 성경이 들어있는 작은 보따리를 박춘권이란 졸병에게 건네게 됩니다. 1899년, 토마스 선교사가 조선 땅에서 순교한 지 33년이 지난 이 때 마펫 선교사 앞에서 한 남자가 이런 간증을 합니다. ‘목사님, 저는 이제 더 이상 이대로는 못살겠습니다. 제가 토마스 선교사를 죽인 박춘권입니다. 그때 그가 죽어가면서 제게 주었던 작은 보따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성경책이었습니다. 그것을 읽고 제 마음에 찔려서 이렇게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당시 토마스 선교사가 마지막으로 건넨 그 한 권의 성경이 한 영혼을 살린 것입니다." 

 

 다시 우리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하나님의 뜻인데 나의 인생인데 결과가 나쁘게 예상이 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모두가 선교사로 순교할 필요는 없다 할 건가! 나는 성공할 거니 빼주세요 할 건가!  인생이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니 괜찮아요 할 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감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했다면 큰일 난 거다. 많은 교회에는 이런 성도가 너무 많다. 어떤 성도냐면 큰일 난 성도 말이다.  말을 들어 보니 교회 오면 성공하고 돈도 잘 벌고 잘 살게 되고 엄청 좋은 일만 생긴다고 해서 왔는데 슬슬 본심을 들어내면서 헌금해라, 봉사해라, 강요 아닌 강요 직분 주면서 교회 안에서도 직분 받고 성공해야 한다는 식으로 유혹받고 순종해 왔을 것이다. 이단이나 사이비가 인생을 망친다고 하는데 아니다 천주교와 개신교에서도 좋다고만 했지 댓가가 필요하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큰일 난 거다. 

 

하나님의 뜻이 나 같은 사람의 순교일까?

 아닐 거다. 절대 이렇게 믿는 게 우리들이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다. 절대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맞다 모세가 이런 모습이었다. 80살이 넘은 나이에 떨기나무 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자신 없어하던 모세 말이다. 

  일반적으로 우린 성경에 위대한 사람들과 견주어서 보잘 것없는 존재라고 인정한다. 그런데 왜 우리들끼리에서는 서로 잘났다고 서로 싸울까 싶다. 애완동물 키운 분들 잘 알 거다. 햄스터, 토끼 이런 온순한 동물들이 사람에게는 순한데 자기들끼리는 아주 사나운 본성을 보이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는 거 말이다.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힘에는 약하나 약한 자에게 강한 본성을 보이는 게 약한 인간들이다. 안심해도 좋은 것이 하나님은 우리를 순교자로 부르시거나 특별한 목적으로 부르시기보다는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부르셨다는 것이다.  이건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성경에 쓰여 있는 말이다.  검색하면 다 나온다. 

 

 하나님의 뜻이 경배와 찬양이 목적이라면 할만하지 않은가 말이다.

 이젠 안심이 될 것이다. 가족에게 살인을 당할 뻔하거나 노예로 팔려가거나 고생 많이 하지 않을 것이고 소중한 아들을 재물로 드려야 하는 것도 아니고 헌금 많이 내고 봉사 열심히 해서 직분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라고 부르신 것이라는 거다.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쉬운거였다는 것이 그리고 그 방법이 단지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는 믿음 안에서 일어난다는 사실도 말이다. 교회 출석에 있지 않고 세례를 받았냐 안 받았냐의 문제도 아니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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