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지 Church

사랑과 용서를 이야기하는 기독교 / 빤스 목사 용서하기

디디대장 2019. 10. 8.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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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골로새서 3장 12~14절)

사랑받는 자처럼..., 용서..., 사랑을 더하라

실제로 살다 보면 용서를 해야 할 찬스에 욕을 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당연한 거다 용서가 필요한 곳에는 죄가 있는 거다. 당연히 욕 먹을 짓만 하니까 욕하게 되는 거다.

 기독인이라도 별 수 없다. 물론 성경에 "욕 하지 마"라고 안 쓰여 있다. 그게 너무 기본이라 쓸 필요가 없었던 거다. 

그런데 "사랑을 받은 자"라면 용서하고 사랑하란다. 다시 말해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은 엉터리 믿는 자라는 소리인가?

 요즘 기독교계에 "빤스 목사"가 나타나 막말과 욕을 한다. 이건 뭐 수준을 논할 가치도 없는 거다. 그 교회 교인도 볼 것 같은 거다. 속한 교단에서 목사직 파면되었지만 종교의 자유가 있는 한국에서 교단 하나를 만든 건지 다른 교단으로 받아주는 교단으로 옮겨 버린 건지 아직도 목사란다. 아~ 뭐 이런 거지 같은 경우가 있나 싶다. 그래도 이들을 한번 용서해 보겠다.

도저히..., 안된다. 왜 안될까?

 위의 성경 말씀을 보면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라고 쓰여있다. 용서는 일방적으로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서로, 피차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인가 보다. ㅋㅋㅋ

 하나님(신)의 사랑은 일방적이지 인데 뭔 소리냐고 할 거다.  하지만 "예수 믿어야 구원이다". 무조건 피동적으로 신이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거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하나님이 넓고 큰 사랑이라 해도 동시에 우리에게 선택권이 존재한다는 거다.

 어찌 보면 주고 받는 관계가 존재하는 거다. 물론 더 사랑하시는 분은 하나님(신)이시다. 연애해 보았으면 알겠지만 더 사랑하는 사람이 더 손해 보는 거다. 기꺼이 그렇게 사랑하신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용서를 받은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 신다.

그래 다시 빤스 목사를 용서해 보자

안된다. 또 왜 안될까?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나서 가능한가 보다.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아 어렵다 빤스 목사 용서하기  포기해야겠다.

 사랑은 못해도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은 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그를 용서한들 서로 용납하고 피차 용서하기는 불가능할 것 같다.

 이것도 빤스 목사도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이 되고 서로 용납하고 피차 용서하기가 될 때 가능할 듯하다.

 만약 이런 모습이 빤스 목사에게 전혀 없다면 그의 정체성은 뭘까?

 빤스 목사가 뭐냐 하는 분에게는 뭐 누구라고 말씀 드릴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글은 빤스 목사를 용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용서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한 글이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 

………………

 장로교 목사인 친구에게 내가 쓴 글임을 숨기고 이 글을 보내니 이런 답변이 왔다. 웃자고 쓴 글을 죽자고 달려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래 글 읽다 짜증이 났다. 사실 내가 쓴 글 조차도 재미없고 어려운 글인데 더 복잡해졌다. 평가나 비평 분석보다는 바른 글을 하나 더 쓰는 게 효과적이라고 나중에 말해주었고 글의 출처는 절대 이야기 안 해주었다. ㅋㅋㅋ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용서하지 않았고 예수님을 믿어야 용서한다는 설은 감리교 및 성결교 순복음 등 웨슬리안 계통 교회의 구원론이지, 더 올라가면 알미니안 주의 구원론이고 서로 용납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저렇게 조건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성경을 완전히 곡해한 거지.

 이건 뭐 평신도도 저렇게 해석 안 하지. 성경을 모르는 젊은 사람들이나 나이 드신 못 배운 어르신들을 빼고는 저렇게 해석 안 하지. 저건 잘못이야.

 용서는 일방적으로 하기 어렵다는 말은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지만 성경은 일곱 번씩 일흔 번씩이라도 용서해주라고 예수님께서 마 18:22에서 친히 말씀하셨지. 용서는 사랑처럼 당연히 해야 하는 게 맞고(옳은 것이고), 그러나 인간의 죄와 약한 믿음 때문에 사랑도 할 수도 있고 못 할 수 있듯이 용서도 할 수도 있고 못 할 수도 있지.

  왜냐면 용서는 사랑의 결과물이기 때문이지. 그러므로 또한 사랑이 사랑의 정도에 따라 일방적으로 할 수도 있고 서로가 할 수도 있듯이, 용서도 사랑의 정도에 따라 일방적으로 할 수도 있고 서로 할 수도 있는 것이지...

 이단까지도 사랑으로 품고 용서하여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지. 그런데 우리의 미련과 약함 때문에 이단에 빠질까 봐 상종을 하지 말라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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