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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교회(기독교연구소)

약한 자를 도우라고 나를 세상에 보내셨지, 교회를 도우라고 보내셨나!

by 야야곰 2025.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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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좀 잘하자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너무 교회만 알고 세상을 모르는 기독인으로 외골수로 살지 말라는 말이다. 물론 대부분의 교인들은 교회만을 위해 살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교회에서 사는 일부 열심히 넘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1. 교회 중심적인 신앙생활

약한 자를 도우라고 나를 세상에 보내셨지 교회를 도우라고 보내셨나?

우리는 교회 중심적인 신앙생활이 매우 익숙하고 자랑스러울 것이다.

교회 성장이 나의 성장으로 착각하면서 말이다.

 

교회를 오래 다니다 보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 같다.

청년에 때에 세상을 품었던 마음은 어느새 이기적으로 변하고
내 교회만 섬기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오기 때문이다. 

 

 주일성수를 잘하고 헌금을 잘 내는 교인이 최고의 교인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게 어렵지 않기 때문에 쉽게 신앙생활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교회에서는 성실한 출석자 의무헌금을 잘하는 자가 올바른 자로 인정받는다.

여기에 봉사로 노동력과 시간을 제공하는 자도 높이 평가받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행동은 쉽고 바로 효과가 나타나는 게 사실이다. 

칭찬받기도 쉽고 좋다. 

 

 하지만 거리에 서서 기도하는 것을 성경에서 비판하였기 때문에

 골방에서 기도하고 나와서 자기 기도한다고 떠드는 이상한 사람은 많다.

 

자기가 기도했다는 것을 은근히 들어내기도 한다. 

"기도도 안 하는 것들이 뭔 말이 많아"하며 다른 성도를 무시하거나

헌금 좀 많이 내면 누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행동도 서슴지 않는 사람도 목격된다.

 

회칠한 무덤 같다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겉은 깨끗하고 아름답게 보일지만 그 속은 더럽고 부패한 것을 의미하는 비유적인 표현이다.

이 말은 주로 위선적인 사람이나 집단 또는 겉과 속이 다른 상태를 묘사하는 말이다.


2. 예수가 중심인 신앙인

그게 그거 아니냐고 한다면 한 끗 차이를 모르는 소리 하는 것이다.

교회의 머리가 예수님이니 교회중심적인 신앙생활이 곧 예수님 중심적인 신앙생활 아니냐고 할 것이다.

말은 그럴싸 하지만 다르다. 

 

종교적 딜라마일 수도 있지만 잘 생각해 보면 원래 기독교는 모이기를 힘쓰기도 하지만

흩어져서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이기도 하다.

요즘 양자역학이 유행을 하니 이해가 잘 되지 않을까 싶다. 

 

예수님이 중심인 신앙인은 주변 사람을 돌볼 일이 있어서 그게 가족이건 친척이건

주일에 교회 못 갔어도 훌륭한 기독인이 될 수 있다.

반대로 교회중심적인 사람은 주일성수를 안 한 죄인이 될 뿐이다.
이건 극단적인 이분법적 사고에서 나온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고 우리의 삶은 예배가 되면

주일성수는 의미 없는 행동이 된다. 

 

그건 유치원생들이 손들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정도의 수준의 종교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그가 충분히 크고 주변을 잘 살필 수 있어진다면 신호만 잘 지키면 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어른에게 왜 횡단보도를 건널 때 손을 안 들고 건너냐고 한다면 웃기는 일이 되는 것처럼 

교회에서 강조하는 주일성수는 사실 너무 유치한 강조이고 억지가 된다. 

 

3. 삶이 예배인 신앙인

설교를 듣고 찬양을 부르는 것만이 예배는 아니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을 교회 노예로 살게 될 것이다.

물론 한 교회를 평생 섬기고 사는 걸 좋아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

그게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행복하다면 된 거다. 

 

대부분의 교회는 주일에 교인을 세상으로 파송한다.

하지만 다시 다음 주일에는 돌아와야 한다.

그렇게 쳇바퀴를 돌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주입시킨다.

멀리 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은 끈으로 묶어 놓은 강아지 같은 신세인 것이다. 

 

아시아 코끼리를 길들이는 방법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한쪽 다리를 어릴 적부터 기둥에 묶어 놓으면 
어른이 되어서도 힘이 충분히 세서 기둥 정도는 뽑아 버릴 수 있지만 

코끼리는 그 작은 기둥이 묶어 놓기만 해도  꼼짝 못 하고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기억 때문에 현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교회 교육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어릴 적부터 예수 믿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주일성수와 헌금생활을 훈련시킨다.

 

4. 십일조 헌금

결혼부터 말하지만 의무헌금인 십일조는 신약시대에는 행할 이유가 전혀 없는 사기에 가까운 헌금이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헌금하는 것이 맞다. 이걸 기준도 모호한 수입의 십일조는 말도 안 되는 착취이고 폭력이다. 

 

얼마나 웃기는 소리를 하는지 모른다.

십 분의 일만 교회에 내면 9는 네 것이라고 하면 그런 게 어디 있어할 것이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냥 네가 버는 모든 돈은 다 하나님 것인데 10을 다 들여야 하는데 1만 받는 거야 그것으로 전부가 하나님 것이라는 걸 인정하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포장한다. 엄청 감동적이라고 생각한다면 뇌가 고장 난 기독인이다. 

십일조를 안내는 것은 도둑질로 표현하기까지 한다. 물론 그런 말이 성경에 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면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까지 하신다. 

1/10을 내면  9만 너희 맘대로 쓰는 게 아니라 더 큰 복을 주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득일 수가 없다.

하지만 이렇게 설교하는 목사들도 부수입(결혼, 장례, 심방)은 십일조를 안 하거나 목회비는 경비라고 사례비에서 빼고 십일조는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자기들도 지키지 않는 십일조인 것이다. 목사인 친구 하나는 교회사역을 하지 않는 관계로 자신의 수입의 십일조를 일본선교사에게 보낸다고 한다. 이것도 엄밀히 따지만 십일조를 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원래 십일조는 구약시대의 전통에 따른 것이다.

신약시대에도 지속해야 한다는 의무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외국에서는 일부 교파만 십일조를 한다.

그리고 천주교에서도 일부에서만 자율적으로 운영될 뿐이다. 

 

 예수님은 십일조를 부정도 긍정도 안 하셨지만 오히려 십일조를 드리면서 사랑을 등한시하는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비판하셨다.

뭐 하는 짓이냐는 것이다. 그렇게 종교 생활하면 의가 나타나냐는 말이다. 

 

따라서  교회 중심적인 신앙생활은 이젠 버려야 할 때가 된 것으로 보인다. 

교회의 노예로 길들여진 코끼리처럼 살지 말고 시키는 대로만 하는 게 

좋은 기독인이 이제는 아닌 시대다

 

https://youtu.be/z6Hw7rHxREY?si=F0K4Jbh-NodGiZN7

 

 

5. 자유로운 신앙인

세상을 향해 나가는 기독인으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교회 안에서 쳇바퀴 돌면서 사는 기독인 되지 말고 교회를 벗어난 기독인이 되라는 말이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서는 세상으로 나가서 살아야 하는데

찬양대 연습해야 하거나 교회 회의에 참석해야 해서 망설이지 않았으면 한다. 

뭔 빠데리 충전하듯이 주일만 되면 교회 와서 복구하고 회복하는 시스템은 원래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렇게 착각하고 살았던 것이다. 

 

교회 밖을 세상이라고 칭하고 세상은 악하고 나쁜 것이라고 가르치면 안 된다.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고 그 아름다운 곳을 더 아름답게 하기 위해 우리 기독인이 존재해야 한다. 

세상을 밝히는 빛과 같고 소금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교회와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단정 짓는 버릇을 버려야 한다.
교회 안에도 악이 존재하고 세상에도 선이 존재한다.

단정 짓고 판단해 버리는 나쁜 습관을 교회에서 주입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건 사실 이단이 많이 쓰는 수법인데 그 이단이 어디서 배웠겠는가 바로 정상적인 교회에서다.

종교사기꾼들이 이걸 너무나 잘 이용한다. 

 

6. 교회 노예로 살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힘든 것이다. 

주일에 교회를 나오는 것이 행복하고 좋을 수 있다. 하지만 평생 좋을 수는 없다. 이게 현실이다. 

나도 교회에 가는 것이 너무 좋은 시절을 아주 오래 보낸 사람으로 

"어떻게 교회 가는 게 안 즐거워, 안 좋아, 이렇게 좋은데" 하고 이해 못 하던 시절이 있었다. 

 

아마도 이런 고민을 교역자에게 말하면

믿음의 문제라고 진단하고 기도하고 말씀 읽으라고 했을 것이다.

물론 나도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 누가 와서 이런 고민을 이야기한다면 다르게 말해 줄 것이다. 

"그럴 수 있어 괜찮아,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좀 지친 것뿐일 거야 내래 놓을 게 있으면 내려놓고 쉬어도 된다.

그동안 잘했어   힘이 생기면 다시 잘 나오면 된다" 이렇게 말해 줄 것이다. 

건강한 그리스도인도 지칠 수 있다. 믿음이 떨어져서도 아니고 신앙이 식어서도 아니다. 
항상 마약 한 사람처럼 뭔가에 취해서 행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교회에서는 이런 상태가 정상이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상태는 절대 정상이 아니다

 

겨우 1주일에 한번 나가면서 지쳤다고 말한다면 그건 믿음이 없어서 일수 있다.

하지만 누구보다 열심을 다했던 사람이라면 그건 믿음의 문제가 절대 아니다

 

교회에서는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비정상적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전에는 그렇게 열심을 내더니 왜 요즘 식은 죽같이 구냐고 오히려 뭐라고 할 것이다.

믿음을 의심받기 싫어서 더욱 애를 써 볼 수도 있겠지만 그건 믿음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지친 것이다. 고갈된 것이다. 의욕도, 열정도, 열의도...,

 

어떻게 사람이 항상 흥분되고 활성화된 상태로 평생을 살 수 있겠냔 말이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건 사람이 아닐 것이다.

 

사랑도 열정도 줄어드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첫사랑과 같은 열정의 시기가 있는가 하면 

가족 같은 인연으로 끊어지지 않지만 반응이 시원치 않을 때도 있는 것이다.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니 믿음을 지키겠다고 억지로 봉사하거나 기도하는 어리석은 짓은 멈추기를 바란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표현할 방법이 교회 출석이라면 한심한 수준이라는 것도 자각하기 바란다. 
하나니은 당신의 교회 출석 체크로 점수를 매기시는 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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